
남겨진 온도
주머니를 더듬는다
구겨진 동전 몇 개와
오늘을 버틴 체온이 있다
작게 부서지는 하루의 소리
누군가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누군가는
조용히 창을 닫는다

중력
6펜스의 만찬
뱃살이 늘어난다는 건
중력을 그만큼 더 잘 견디겠다는
어느 예술가의 묵직한 다짐
현실은 정직한 6펜스짜리 빵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마음이 두툼해
맛은 잘 설명할 수도 없지만
이상하게도
자꾸만 다음을 먹고 싶어진다
들어가는 말 _달을 꿈꾸며, 6펜스의 빵을 굽는 1년의 기록
어느덧 계절이 네 번 이름을 바꾸고,
제 글이 여러분의 편지함에 쉰한 번의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사실 1주년이라는 근사한 숫자에 어울리는 문장을 찾으려 애썼습니다.
고백하자면, 창작의 고통보다는
매일 식탐과의 전쟁에서 패배해 묵직해진 뱃살을 쓰다듬으며,
지푸둥한 몸을 일으키려 애쓰는 평범한 한 사람일 뿐이더군요.
하지만 이 평범함이야말로
1년을 함께 버텨온 진짜 동력이 아닐까 생각하며,
오늘도 진심 한 방울을 묻혀봅니다.
이상과 현실의 이중주
요즘 저는 묘한 모순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소설 <달과 6펜스>를 읽으며
현실을 내던진 예술가의 광기 어린 ‘달’을 훔쳐보고,
다른 한쪽 귀는
‘마약’ 같은 정치 뉴스의 자극적인 소음에 중독되어
세상 돌아가는 소란에 온 신경을 뺏기곤 합니다.
이 소란스러운 모순 속에서 저를 다잡아준 건
예상치 못한 만남과 곁에 있는 온기였습니다.
며칠 전 제 갤러리로 아주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호주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고,
인도인 셰프 남편과 함께 사는 한 작가님이셨죠.
저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닿아,
한국에 들어온 귀한 시간을 쪼개 저를 만나러 오신 겁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영감이 되어주는
희망적인 대화를 뜨겁게 나눴습니다.
제 책에 수줍게 사인을 담아 선물하며,
저는 그분이 가져온 ‘달의 향기’에 취해
잠시 지상의 중력을 잊기도 했습니다.
그날 저녁, 그 기운으로
마음에 쏙 드는 그림 한 점을 그려냈을 때의 희열이란!
삶의 한 조각을 내어준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제 6펜스의 세상에는 묵묵히 제 곁을 지키는 아들이 있습니다.
프리랜서로 바쁘게 뛰면서도
엄마의 그림 홍보와
영상 작업까지 도맡아 하는 든든한 조력자죠.
며칠간 몸이 좋지 않아 안쓰러웠는데,
그 가라앉은 컨디션으로도
모니터 앞에 앉아 영상을 편집하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대신 아파줄 순 없지만,
제 몫의 삶과 엄마의 일까지 지켜내려는 그 성실함이
눈물겹도록 고마웠습니다.
아들의 그 뒷모습은 저에게 어떤 위대한 예술 작품보다
더 큰 울림을 주는 ‘살아있는 문장’이었습니다.
문득 깨달았습니다.
지난 1년 동안 제가 여러분께 보내드린 글들은
어쩌면 ‘달’을 꿈꾸면서도 ‘6펜스’의 땅을 딛고 서 있어야만 하는
우리 모두의 분투기였다는 것을요.
‘이상’은 저 멀리 밤하늘의 달처럼 고고하지만,
우리가 ‘오늘’을 살아내게 하는 건
입맛을 돋우는 맛있는 음식과 가족의 온기,
그리고 지푸둥한 몸을 일으켜 세우는 작은 책임감들입니다.
1주년을 맞이해 저는 거창한 다짐 대신,
제가 그린 작은 그림 한 점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캔버스 위에는 정치 뉴스보다 더 선명한 색채가 있고,
식탐보다 더 진한 몰입의 흔적이 있습니다.
구독자 여러분,
지난 1년 제 글이 여러분께 ‘달’이었나요,
아니면 따뜻한 ‘빵’ 한 조각이었나요?
무엇이었든 좋습니다.
다만 다음 1년도 우리는 여전히 비틀거리겠지만,
한 손에는 6펜스를 쥐고 눈은 달을 향해 걷는
이 여행을 함께해주시길 바랍니다.
몸은 조금 무겁지만,
마음만은 가벼운 오늘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나가는 말
지난 1년은 제게 ‘달’을 그리는 시간인 동시에,
아픈 몸을 이끌고 제 옆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아들의 등 뒤에서 ‘고마움’이라는 6펜스를 줍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식탐을 이기지 못해 불어난 뱃살처럼,
여러분을 향한 제 애정도 그렇게 야금야금 부풀어 올랐습니다.
비록 현실 정치는 여전히 시끄럽고,
제 뱃살은 식탐의 승전보처럼 당당하지만(웃음),
저는 여전히 캔버스 위에
마음에 드는 선 하나를 긋기 위해 고군분투 중입니다.
1주년을 맞아 제가 드릴 수 있는 선물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내일도 우리는 여전히 흔들리겠지만,
달을 꿈꾸며 오늘 분의 빵을 맛있게 굽자’는 다정한 제안뿐입니다.
오늘 저녁엔 식탐에게 조금만 져주고,
대신 달빛을 닮은 차 한 잔을 곁들여보시는 건 어떨까요?
저도 오늘은 아들에게 수고했다는 말 대신,
6펜스보다 훨씬 묵직한 사랑을 담아 등을 토닥여주려 합니다.
함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타자의 시선이 작품에 머물 때
– 에디터의 작품 감상 –

6펜스로 구겨진 하루 펴기
〈남겨진 온도〉
〈중력〉, 〈6펜스의 만찬〉
마음대로 하루가 풀리지 않을 때면 우리는 늘 주머니를 더듬습니다. 오늘의 두 작품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쓰고, 한쪽에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다른 한쪽에서는 조용히 창을 닫습니다. 그래서 이 생각의 결론은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면 되는 것은 아닐까’로 결정되곤 합니다.
몸이 점점 부어오르든지, 하루가 동전 몇 개처럼 구겨지든지 우리는 다시 펴 보려고 합니다. 그 접혔던 흔적은 없어지지 않지만, 어떤 그림인지는 볼 수 있어 그나마 나은 하루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