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안녕하세요, 구독자여러분. 이번 한 주도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삶’이라는 무게를 견뎌내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최근에 저는 독서 모임 회원들과 함께 서머싯 몸의 고전, <달과 6펜스>를 읽었습니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돌연 그림을 그리겠다며 가족도, 책임도 다 버리고 떠나버린 주인공 스트릭랜드의 이야기를 읽으며 묘한 감정에 휩싸였습니다. 그의 비정함에 화가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더군요.
사실 고백하자면, 저에게도 오직 붓 한 자루만 쥐고 세상의 모든 의무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스트릭랜드 같은 순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밤하늘의 숭고한 이상(달)을 바라보면서도, 여전히 발밑의 짤랑이는 현실(6펜스)에 마음을 졸이는 저의 지극히 솔직하고 사적인 고백을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나의 유쾌한 이중생활 _달과 6펜스 사이
그림은, 가슴 한 켠에 잘 접어 넣은 편지 같았다. 보내지 못한 채 주소만 선명한. 현실이라는 이름의 ‘6펜스’짜리 은화가 사정없이 내 뺨을 때렸을 때, 의무와 삶의 무게가 가장 무겁게 내리누르던 바로 그 순간 나는 그 편지를 꺼내 들었다.
그래서일까, 내 그림에는 가끔 빛보다 그림자가 더 많다. 누군가는 물을지 모른다. 먹고살기도 힘든데 무슨 팔자 좋게 그림이냐고. 하지만 나에게 그림은 사치가 아니라 생존의 숨구멍이었다. 사방이 벽으로 막힌 현실에서 하늘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창문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요즘의 나는 조금 바쁘다.
기도도 하고, 살림도 살고, 그리고—그림으로 돈을 벌 수 있을지 생각한다.
달을 그리면서 6펜스를 계산하는 일—
서머싯 몸의 소설 <달과 6펜스>의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가 떠올랐다. 마흔이 넘은 어느 날 갑자기 그림을 그리겠다며 런던의 안정적인 삶과 가족을 팽개치고 파리로, 타히티로 떠나버렸다. 달(이상)을 쫓기 위해 바닥에 떨어진 6펜스(현실)를 짓밟아버린 사내.
솔직히, 나는 그의 천재성이 부럽기보다 그의 무책임함에 화가 났다. 나는 크리스천이고, 한 아들의 엄마이며, 교우들의 삶을 기도로 품어야 하는 목사의 아내다. 나에게 부여된 이 삶의 보금자리는 짓밟고 떠나야 할 ‘6펜스’가 아니라, 내가 지켜내야 할 거룩한 성전(聖殿)이기 때문이다. 나는 소설 속 주인공 스트릭랜드처럼 비정해질 수도 없고,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꿈이 현실이 된 지금, 나는 또 다른 형태의 거대한 벽 앞에 서 있다.
“하나님, 이 그림으로 제 차가운 주머니도 좀 따뜻해지면 안 될까요?”
기도라기보단 투정에 가까운 독백이 가끔 튀어나온다. 늦게 시작한 꿈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에, 이제는 이 그림이 내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실질적인 ‘6펜스’가 되어주길 바라는 솔직한 욕망이 고개를 드는 것이다. 달을 그리고 있으면서도, 눈은 자꾸만 발밑의 은화를 쫓는 내 모습은 얼마나 모순적인가.
순간, 붓을 씻다 말고 물끄러미 내 손을 바라보았다. 낮 동안 성도들의 아픔을 서툰 기도로 토닥이고,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을 위해 따뜻한 밥을 짓던 손이었다. 소설 속 스트릭랜드처럼 세상의 모든 인연과 의무를 난폭하게 끊어내야만 도달할 수 있는 달이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 달을 포기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의 그림은 도망이 아니라 남아 있음에서 시작된다. 목사의 아내로, 나만의 영토를 일구는 화가로 사는 일. 이 이중생활이야말로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가장 유쾌한 축복이라 생각한다.
스트릭랜드의 달이 밤하늘에 홀로 고독하게 떠 있는 차가운 얼음덩어리 같다면, 나의 달은 시린 겨울날 우리 집 작은 식탁을 비추는 노랗고 따스한 촛불이기를 바란다. 나는 달을 향해 가는 사람이 아니라, 달을 집 안으로 들여오는 사람이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그 달빛이 내 삶의 가장 현실적인 부분까지 적셔 오게 될 것이다.
오늘도 나는 여전히 달과 6펜스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내일도 나는 사뭇 경건한 마음으로 숫자 앞에서 잠시 침묵하겠지만(6펜스), 이내 세속의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다시 캔버스 앞에 앉아 나만의 빛을 칠할 것이다(달). 무책임한 천재는 되지 못할지언정, 삶을 사랑한 ‘한붓시인’으로 남고 싶다.
내 손에 쥔 붓이 하나님의 섭리를 담는 도구가 되기를, 그리고 언젠가 이 붓이 내 삶의 무게를 가볍게 해줄 현실의 축복이 되기를 기도하며, 나는 오늘도 달을 향해 한 붓을 긋는다.
나가는 말
스트릭랜드는 눈이 멀어가는 순간에도 방치된 방의 사방 벽면에 거대한 걸작을 남겼고, 결국 그것을 불태움으로써 자신만의 ‘달’을 완성했습니다. 참 장엄하고도 지독한 예술가이지요.
하지만 저는 제 삶의 벽면을 온통 그림으로 채운 뒤 불태워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제 그림은 매주 제 글을 읽어주시는 여러분의 마음에 닿아야 하고, 무엇보다 제 사랑하는 아들과 남편이 살아가는 이 작은 보금자리를 따뜻하게 데우는 땔감이 되어야 하니까요.
여전히 제 기도의 제목은 “주님, 제 마음의 중심을 잡아주소서”와 “주님, 이번 달도 제 주머니에 바람만 불지 않게 하소서”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갑니다. 하지만 이 모순 가득한 줄타기야말로, 하나님이 제게 허락하신 가장 인간답고 아름다운 캔버스가 아닐까 싶습니다.
구독자 여러분, 당신의 손에 쥐어진 ‘6펜스’의 현실은 오늘 얼마나 무거웠나요? 그리고 당신의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은 여전히 안녕한가요? 현실에 치여 꿈을 잊지 않기를, 그러나 꿈을 핑계로 내 곁의 소중한 이들을 아프게 하지 않기를. 우리 삶의 그 적절한 온도를 위해 저도 함께 응원하겠습니다.
달빛이 유난히 밝은 밤을 그리며, 여러분의 마음에 한 줄기 빛을 보냅니다.

은화를 씻는 물통
붓을 씻는 플라스틱 물통 속은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진흙탕
빨강과 파랑의 세속적인 욕망이 녹아든다
뿌옇게 번지는 물감들을 들여다보니
동글동글한 은화처럼 반짝이는 것도 같다
이게 다 6펜스짜리 은화라면 좋을 텐데
예술은 배고픈 것이라 누가 말했나
나는 배가 고프면 붓이 떨려 선을 못 긋는다
천재들은 세상을 버리고 타히티로 가지만
나는 이 작은 방에서도 우주의 모든 색을 본다
하늘의 차가운 달만 쳐다보다가 목이 디스크 걸리는 것보다는
발밑의 6펜스 은화를 부지런히 주워다가
가족들 고기반찬 먹이는 게 더 예술적이지 않나?

기도문 원본
기도는 가끔 거래처럼 오해받는다
이만큼 드렸으니 저만큼 돌려주세요
오늘 나의 기도는 주님께 부치는 청구서 같다
앞장은 회개로 시작했는데
뒷장은 자꾸만 금액을 적고 만다
소설 속 어떤 남자는 달 하나 보겠다고 삶을 통째로 던졌다지만
나는 오늘도 계란 한 판의 가격 앞에서 충분히 현실적이다
그래서일까 내 붓질은 가끔 기도보다 정직하다
아, 이것이 나의 기도문 원본이겠구나
타자의 시선이 작품에 머물 때
– 에디터의 작품 감상 –

희생의 미학
〈은화를 씻는 물통〉
〈기도문 원본〉
그림을 그릴수록 캔버스 위 이미지는 점점 색을 갖추고 이야기를 만들어 갑니다. 어떤 형상을 닮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감정이 나타나기도 하죠. 그런데 그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한편에선 더러워지고 답답해지고 흐릿해지고 깜깜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바로 붓 닦이 천과 물통입니다.
그들의 희생이 없이는 작품은 탄생하지 않습니다. 좀 더 투명하고 맑은 그림을 위해선 좀 더 자주 이들은 갈아치워집니다. 어떤 것의 완성 이면에 항상 존재해 온 과정입니다.
이제는 너무나 풍요로운 시대입니다. 과거에는 물감이 참 귀했습니다. 안료를 구하고 그것을 적당한 물과 기름과 다른 재료들을 비율에 맞춰 섞어 사용했습니다. 그러니 붓 한 획이 굉장히 소중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가격은 매우 저렴한데, 물감의 질은 더 좋아졌습니다. 그래서인지 예전에는 시도하지 못했던 엄청난 양의 재료가 들어가는 작품들도 자주 보입니다. 그에 반해 작품을 만들다 나오는 ‘찌꺼기’라고 불리는 것들을 아까워하는 작가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겐 모든 재료 다 의미가 있습니다. 버려지는 것이 없는 작가도 있죠. 어쩌면 저는 오늘 두 작품 속에서 그런 한쪽에 버려질 뻔한 것들이 다시 뭉치고 재조명되는 현장을 목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감 묻은 붓이 단번에 물통 바닥까지 침수합니다. 그러면서 투명한 물에 색 구름이 피어납니다. 그 사이사이로 지난번에 썼던 색들이 아직 남아 있었는지 같이 묻어 나옵니다. 순간 삶의 치열함이 떠오릅니다. 작품이 탄생하는 순간 옆에서 피어오르는 치열함이죠. 누군가의 탄생에 잇따르는 희생의 아름다움이 느껴집니다.
펜이 잘 안 나올 때는 연습장을 하나 꺼내 마구 그어봅니다. 작가에겐 그 긋는 선들과 장면까지 소중합니다. 그었던 모든 선이 흩어지지 않게, 헛된 뭉침이 있지 않도록 잘 문지릅니다. 이내 거기에는 한 얼굴이 떠오르며 자화상을 만들어 냅니다. 나를 닮은 자화상이 아닌 내가 탄생하기까지 한편에서 희생된 다른 자아의 자화상입니다.
좋은 결과에는 항상 희생이 따릅니다. 희생의 값이 결과가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작가는 그 이면의 순간까지 기록하려고 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