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 위에 심어보는 진짜 숲 이야기
답답한 마음이 밀려오는 날이면 차를 몰고 도시의 외곽으로 달리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초록의 풍경이 그리워서다. 빌딩 숲을 벗어나 온통 초록으로 싱그러운 자연을 마주하고 싶은 날, 그건 단순히 눈의 휴식이 아니라 마음이 찾아가는 본능일 것이다. 초록이 이어지는 풍경 속에 있으면 내 안에 쌓였던 작은 소음들이 잠잠해진다.
세상의 수많은 색 중에서도 나는 유독 초록을 사랑한다. 이름 모를 들풀 하나, 이름 없는 나무 한 그루가 건네는 조용한 위로는 그 어떤 화려한 꽃보다 깊고 듬직하다.
꽃들이 품은 화려하고 우아함도 참 아름답다. 때로는 은은한 여성스러움과 귀티도 느껴진다. 그래서 꽃을 바라볼 때면 감탄하게 된다. 하지만 나무에는 이상한 힘이 있다.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존재의 냄새가 난다. 나무가 가진 묵직하고 든든한 ‘남자의 냄새’ 같은 풍모에서 왠지 더 깊게 기대고 싶어진다.
내 캔버스에는 언제나 초록이 가득하다. 풍경을 고스란히 베껴 내기보다는, 수많은 나무들이 덩어리를 이루어 다가오는 그 거대한 마음의 풍경을 추상으로 풀어내곤 한다. 내가 느꼈던 감정을 한 편의 감상문처럼 색으로 적어 내려가는 것이다. 흥미로운 건 나의 팔레트에는 초록의 색채 속에 ‘반짝이는 은색’이 당당히 한자리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낯설어할지 모를 그 도도한 듯한 은빛의 결을, 나는 기꺼이 가장 눈부신 초록의 다른 이름으로 인정한다. 숲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 나뭇잎 위에 맺힌 빛, 오래된 나무껍질 사이로 흐르는 시간의 흔적까지도 모두 초록의 언어라고 느낀다. 다만, 이 미묘한 질감과 빛의 속삭임이 실물이 아닌 차가운 사진 화면 속에는 온전히 담기지 않아 늘 아쉬움이 남는다.
며칠 전,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갔다가 우연히 한 권의 책을 만났다. 박상진 교수의 『옛 그림 속의 우리 나무』였다. 책장을 넘기며 김정희의 《세한도》와 정선의 《화강백전》을 비롯한 옛 그림 속 나무들을 마주했다. 그 나무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었다. 선비의 마음이었고, 시간의 기록이었으며, 삶을 견디는 정신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내 그림 속 나무들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그 책은 내게 조용한 깨달음을 주었다. 아, 내가 그려온 초록의 숲과 추상적인 마음의 풍경들은 단순한 장식적 유희가 아니었구나. 그것은 오랜 세월 한자리를 지켜온 흔적, 계절을 지나며 쌓인 기억, 잎을 피우고 떨어뜨리며 다시 살아나는 생명의 힘이었구나. 덕분에 나는 내 그림을 조금 더 사랑하게 되었다. 거칠고 무성한 이 색채의 숲 속에, 오늘은 훨씬 더 깊고 단단한 마음의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제 나는 무엇을 그리든 그 안에 담긴 ‘시간과 흔적’을 조금 더 바라보게 될 것 같다.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은 숲의 모습이 아니라 숲이 내 마음에 남긴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그림은 그렇게 하나의 깊은 숲이 되어갈 것이다.

초록 에너지
초록 에너지
도시의 소음이 숨을 막아설 때
조용히 외곽으로 달리고 싶다
눈길을 사로잡는 화려한 꽃보다
남자의 깊은 향기 짙게 배어 든
초록에 기대어 마음을 놓는다
풍경을 그리려다 감상문을 적는다
그 틈새로 살며시 붓 끝을 스치는 은빛
내가 사랑하는 또 하나의 초록
형상은 사라지고 에너지로 남은 나무여
그대의 무성한 잎사귀 속에
내 마음의 뿌리를 단단히 내리노니
거친 붓끝이 지나간 자리마다
비로소 내 캔버스의 진짜 소리를 듣는다

초록 한 잔의 용기
초록 한 잔의 용기
짙푸른 녹음 한 보울에
금빛 햇살, 은빛 바람
마구 흔들어 완성한
한여름 숲의 특제 음료
얼컥벌컥 마셔버린
초록빛 한 모금에
나도 모르게 초록의 한 조각 되어
세상 어떤 고민도 ‘풋!’ 하고 웃어넘길
싱그러운 에너지가 솟구친다
타자의 시선이 작품에 머물 때
– 에디터의 작품 감상 –

원경과 근경 그 속의 마음 전경
〈초록 에너지〉
〈초록 한 잔의 용기〉
온통 초록빛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더 자세히 바라봅니다. 거의 모든 색이 들어있습니다. 모든 색은 그저 초록의 엑스트라일 뿐입니다. 초록을 빛내주기 위한 모두의 노력 같습니다. 그렇게 물끄러미 보다 보니 어느새 재밌는 이미지가 저를 맞이합니다. ‘멀리서 본 숲’과 ‘내 발밑의 물가’입니다.
<초록 에너지> 작품을 먼저 보겠습니다. 작품시에서도 보이듯 나무가 어렴풋이 보입니다. 마치 멀리서 바라본 숲과 호수 같습니다. 호숫가의 표면 위로 많은 것들이 비칩니다. “붓 끝에 스치는 은빛 / 내가 사랑하는 또 하나의 초록” 어쩌면 이 푸른 빛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 호숫가 바로 위, 중앙에는 어떤 물체가 보입니다. 동물일까요? 작가 자신일까요? 그것은 알 수 없으나 작가가 남긴 말을 따라가다 보니 어쩌면 작가의 정신을 담은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붓 그 끝에 정신을 담아 그려낸 것이죠.
그 붓끝을 따라 호숫가로 가까이 다가가 봅니다. 어느새 발밑의 얕은 물이 느껴집니다. 이어서 작품 <초록 한 잔의 용기>를 보겠습니다. 어디서 떠밀려 왔는지 풀과 꽃잎이 얕은 물 위로 떠다니는 듯합니다. 물이 얕고 맑아서 그런지 바닥까지 비칩니다. 강렬한 검은 선들이 부랑하는 추상화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 선들은 단지 그림자였습니다. “싱그러운 에너지”를 부각고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일렁임이 작가가 말한 “한여름 숲의 특제 음료”일까요?
숲은 멀리서 보나 가까이서 보나 아름답습니다. 그러니 여러 화폭에 다양하게 표현되는 까닭이겠습니다. 그래서 저마다의 풍경화 속에는 저마다의 마음이 담깁니다. 오늘의 작품에선 원경과 근경이 보입니다. 그 속에서 저는 작가의 마음 전경을 발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