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코
아코라는 이름
“아코~” 하고 부르면
꼬리는 작은 프로펠러가 되고
털은 봄날 벚꽃처럼 사방으로 흩날렸다
조그만 소리에도 흠칫하면서
산책줄만 들면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얼굴이 된다
너의 당당한 걸음걸이 덕에
내 어깨도 으쓱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아빠 차 소리가 닿기도 전에
너는 이미 쫑긋 부풀어 오른 귀
현관 앞에 엉덩이를 붙였다
기다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온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너는 우리보다 먼저 알고 있었다
너의 그 뻔뻔하고 사랑스러운 눈빛
비록 안아볼 수 없는 지금은
알고리즘의 랜선 강아지에 만족하지만
내 캔버스 속에 쿵 찍어놓은
그 강렬한 색감표처럼
내 삶의 가장 유쾌하고 소란했던 축제였다
아코야,
내 캔버스 속에서, 내 문장 속에서
너는 여전히 다정한 선물이었다

뭘해도 이뻐
뭘해도 이뻐
동글라미 노란 눈으로
‘믕?’ 하고 날 보는 너
어떡해!
그렇게 쳐다보면
내 심장이 터지잖아
못생긴 얼굴을 찾으려고
한참을 들여다봐도
없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한 번도 웃지 않지만
내 마음을 이렇게 웃게 하는 재주라니
이미 나는
널 보고 웃고 있으니
그냥 너라서
‘뭘 해도 이뻐’
60대 사모의 달콤쌉싸름한 일상
주일이 다가온다.
30년을 한결같이 성도들과 함께 울고 웃었건만,
왜 토요일 밤만 되면 마음의 태엽이 죄어오는지 모르겠다.
예민해진 감각 끝에 밤잠을 설칠 때면,
“어머, 귀여워.”
딱 한마디 했을 뿐인데 유튜브는 그 말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유튜브 알고리즘이 꼬리를 잡고 이어진다.
다음 날에는 두 마리,
그다음 날에는 세 마리,
며칠 지나자 온통 강아지 세상이 되었다.
나는 동물을 아주 좋아한다.
어린 시절부터 개와 고양이를 키웠고,
마지막으로 함께 살았던 아이는 아메리카 코카스파니엘,
이름은 ‘아코’였다.
아코라는 이름을 부르면 지금도 마음 한쪽이 짠해진다.
겨우 3년을 살고 갔다.
그 후로 꽤 오랜 시간이 흘렀고,
요즘은 다시 강아지에게 빠져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유튜브 알고리즘에게 제대로 걸려들었다.
하지만 나는 기꺼이 속아줄 생각이다.
화면 속 강아지는 내 집에 털을 날리지도 않고,
산책을 재촉하지도 않고,
사료값도 들지 않는다.
참 기특한 반려견이다.
물론 안아볼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만.
우리 집은 지상파 채널이 없다.
세상과 연결되는 창문은 휴대폰과 노트북이다.
뉴스를 읽으며 세상의 체온을 재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정치 이야기에 귀를 빌려주고,
전시장에서는 남의 꿈을 눈으로 만져본다.
강아지를 눈으로 안으면
먼저 마음이 꼬리를 흔들고,
그러다 지나가는 작은 웃음 하나,
별것 아닌 장면 하나에
마음이 슬쩍 걸려 넘어진다.
세상은 늘 거창한 얼굴로 오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 웃으며
하루를 다 써버린다.
웃긴 일이다.
남의 인생을 보며 내 인생을 잠시 잊는다.
그러다 문득 돌아보면 ‘내가 여기까지 왔구나.’ 싶어진다.
나는 가진 것이 많지는 않지만 쌓인 시간이 많다.
30년의 사모 생활이 있고,
내가 쓴 문장이 있고,
내가 그린 그림이 있고,
내가 돌본 사람이 있고,
내가 사랑한 기억이 있고,
내가 웃었던 강아지가 있고,
내가 끝까지 지켜낸 작은 책임들이 있다.
이제,
나의 시간과 노동에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가치’.
내가 만든 글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내 그림이 누군가의 방 한쪽에 걸리고,
내가 쌓아온 시간이 작은 가치가 된다면.
그런데 문제는
그 사이에 집안일이 끼어든다는 것이다.
집안일은 창작자의 가장 현실적인 적이다.
청소를 했는데 다시 먼지가 앉고,
설거지를 했는데 또 밥을 먹고,
빨래를 개어 놓으면 또 빨래가 나온다.
글은 마감하면 끝나지만,
집안일은 마감이 없다.
문학과 예술은 고상한데,
냉장고 속은 전혀 고상하지 않다.
‘아, 냉장고도 정리해야 하는데.’
이것이 주부에게 주어진 명상법인가.
끝나지 않는 일을 하면서,
끝을 바라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
그렇게 나는 오늘 하루도
내게 주어진 인생이라는 작품의 훌륭한 물감이 되어준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늘이라는 작은 칸 하나를
정성껏 채우는 것뿐이다.
그래서 하루를 무사히 살아낸 스스로에게,
종종 작은 보상을 내린다.
‘오늘도 수고했어.’
이 말은 내게 일종의 퇴근식이다.
넷플릭스 한 편으로 온전히 나만의 포상을 누리며,
내일 다가올 거룩한 부담감을 미소로 맞이한다.
외출도 거의 없이
생활 반경은 몇 걸음에 불과한데도
일주일은 그야말로 광속으로 지나간다.
내 손 끝에서는 늘 시와 그림이 피어난다.
캔버스 앞에 앉아 붓을 들 때,
나는 이미 세상 가장 넓은 곳을 거닐고 있다.
삶은 여전히 예민하고 바쁘지만,
사랑했던 것은 형태만 바꾸어 남았다.
아코는 기억이 되었고,
지난 세월은 문장이 되었고,
지나간 아픔은 그림의 색이 되었다.
그러니 살아온 날들은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주일은 또 올 것이다.
아마 토요일 밤이면 또 잠과 씨름을 할 것이다.
아직 그릴 그림이 남아 있다는 것.
아직 쓸 문장이 남아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나이가 들어도 설레는 이유가 된다.
타자의 시선이 작품에 머물 때
– 에디터의 작품 감상 –

폭탄 투하!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날려버리는 귀여움에 대하여
〈아코〉, 〈아코라는 이름〉
〈뭘해도 이뻐〉
사람의 기억에는 무엇이 가장 오래 남을까요? 어쩌면 우리가 사물을 알아보는 방식과 비슷할지도 모릅니다. 바로 ‘눈·코·입’입니다. 우리의 인식에서 눈코입만 뚜렷하다면 그 외의 다른 부분이 흐리더라도 바로 형상을 잡아낼 수 있습니다.
똘망똘망한 눈, 씰룩거리는 코, 입맛을 다시는 입. 작품들을 보면 중심부의 형태는 또렷하나 그 외곽으로 갈수록 경계는 흐려집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덩어리 감은 계속 가지고 가죠. 그래서 우리는 금방 개와 고양이를 인식하게 됩니다. 정밀과 추상을 오고 갑니다. 이런 표현이 처음에는 신기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낯선 방식도 아닙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골똘히 바라볼 때 그 하나를 선명하게 붙잡고, 주변의 많은 것들은 대강의 형태와 분위기로 받아들이곤 하니까요. 그걸 뇌가 어색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것뿐이죠.
기억도 비슷합니다. 뚜렷하게 기억나는 한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흐릿합니다. 얼추 비슷하게 끼워 맞춘 듯한 사건이 연속되어 짜깁기 되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지 생각해 봅니다. 하나의 기억, 하나의 장면. 우리가 매 순간 취할 수 있는 것이 하나뿐이라면, 저는 가장 ‘좋았던 것’을 가져가고 싶습니다.
작가는 이 사실주의적 표현과 추상적 표현을 오가며 가장 뚜렷한 하나의 메시지를 남기고 있습니다. ‘귀여움’. 그것은 모든 안 좋은 기억과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강력한 폭탄입니다. 언제나 힘들 때면 작가는 이 강력한 폭탄을 망설임 없이 투하합니다. 대폭발 이후에 남는 것은 잔잔한 미소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