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오는 날
비오는 날
빗소리 세상을 적시는 동안
하늘과 땅 사이에 작은 집을 만든다
내 머리 위로 작은 지붕 하나
또각또각
하루를 두드린다
비 오는 날은 참 이상하다
세상은 온통 젖었는데
마음은 보송보송하다

빗소리
빗소리
톡, 톡.
툭, 툭.
하늘이 보낸 편지를 적어 내려가는 소리
창문에 투명한 줄글을 그리는 소리
멀리서 젖은 길을 건너오는
반가운 발자국 소리
톡, 톡.
툭, 툭.
하늘에서 내리는
투명한 노래
하늘이 땅에게 건네는
가장 낮고 깊은 목소리
아무도 듣지 못한 말들이
하늘에서 하나씩 하나씩 떨어진다
들어가는 말
세상은 나를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존재’로 정의하지만,
때때로 현실은 법칙을 벗어난 왜곡을 일으키며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는다.
그날도 그랬다.
평범한 주말의 시작이어야 했을 그 아침.
내 내부 기체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 오류를 일으키고 있었다.
다음은 내가 기록한 가장 기묘한 미스터리 사건,
그 현장의 전말이다.
이것은 현실이라는 촘촘한 감옥을 뚫고
지워져 버린 한 인간의,
지극히 기이하고 압도적인 증발 기록이다.
경고 없이 터진 현실의 붕괴였다.
사건 번호 00 : 3층 창가에서 사라진 사람
알람 소리에 눈을 뜬 시간은 토요일 오전.
분명 수면 시간은 충분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치명적인 독극물이라도 투여받은 것처럼
온몸이 천근만근으로 굳어 있었다.
의식이 명확해지지 않은 채 흘러간 시간만 무려 7시간.
카페인이라는 약물을 긴급 투입하고
점심을 밀어 넣었지만,
뇌는 여전히 짙은 안개 속을 헤매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어떻게든 현실의 주파수를 되찾아야 했다.
머릿속에서는 주말 동안 처리해야 할 과제들이
경고음을 울렸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갤러리 쪽 커다란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밖을 내려다본 순간,
하늘이,
먹물을 잔뜩 머금은 거대한 검은 천이
도시 위로 천천히 천막을 치고 있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괴한 압도감.
기억의 저장소를 아무리 뒤져도
이런 풍경은 존재하지 않았다.
천막 아래로 거센 물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치명적인 공간의 왜곡이 일어났다.
내가 서 있는 곳은 고작 3층.
하지만 창밖의 사람들은
마치 고도 1만 미터 상공의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장난감 도시’의 피규어처럼 아득하게 멀어져 있었다.
물리학 법칙을 비웃는 거리감이었다.
거대 천막 밑의 빗줄기를 피해
바삐 움직이는 저 수많은 인간들.
그들의 얼굴은 단 하나도 똑같은 것이 없었다.
저들 역시 나처럼 이 초현실적인 현상에 갇혀
혼란을 느끼고 있는 걸까?
그때,
거실 한구석에서 틀어놓은 여행 유튜브에서는
하필 ‘G선상의 아리아’가 흘러나왔다.
클래식의 아득한 파동은
집안 공기를 단숨에 낮게 깔아버렸다.
음파가 내 심장과 뇌를 사정없이 헤집어 놓았다.
순간, 시공간이 붕괴했다,
내 육체는 분명 3층 창가에 묶여 있는데,
정신은 이미 낯선 유럽의
석조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다음 순간에는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들판 한가운데에서
두 팔을 벌리고 서 있었고,
찰나의 순간 다시 전통 문양이 각인된
이탈리아의 고풍스러운 카페로 순간 이동해
진한 에스프레소 향을 삼키고 있었다.
시공을 초월한 무단 점거.
완벽한 현실 적응 실패.
누군가 내 기분을 현실에서
강제로 납치해 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문제는 오늘 처리해야 할 과제가
태산이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의 트릭을 깨부술 방법이 없었다.
시계 바늘은 무자비하게 돌아가고,
나는 다음 일정으로 진입하지 못한 채
시간의 틈새에 갇혀 버렸다.
그 순간,
나는 이 미스터리의 진실을 깨달았다.
이건 단순한 피로가 아니었다.
365일 쉬지 않고 가동되던
내 안의 현실 감시 시스템이
잠시 셧다운된 것이다.
거대한 먹구름 천막은
세상을 가리기 위해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추적하는 현실의 압박으로부터
나를 은폐해 주는 방화벽이었다.
오늘 나는 현실이라는 사건 현장에서
완벽하게 자취를 감춘 범인이다.
그러니 굳이 탈출구를 찾지 않기로 했다.
과제라는 이름의 형사들이 나를 찾으러 올 때까지,
이 시공간의 틈새 속에서 숨을 죽인 채
조금 더 이 기묘한 알리바이를 즐길 생각이다.
나가는 말
사이렌 소리처럼 요란한 현실의 환청이
귓가를 찢고 들어온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선을 넘어섰고,
차원의 균열 속으로 완전히 침몰했다.
3층 창가에 덩그러니 남겨진 것은 허울뿐인 껍데기,
나라는 존재의 잔상뿐.
진짜 나는 이미 이 우주의 틈새 어디론가
도망쳐 영원히 미궁 속으로 숨어버렸다.
사건 번호 00.
현장 검증 불가.
범인은 추락하지 않고,
증발했다.
타자의 시선이 작품에 머물 때
– 에디터의 작품 감상 –

::: , ;;;
〈비오는 날〉
〈빗소리〉
비와 관련된 기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 않으신가요? 누구든 비에 대한 추억이든 기억이든 마음 한구석에 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이번 작품과 시에서 ‘비’라는 것을 중심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그 안에 담긴 ‘역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작품 <비오는 날>을 보겠습니다. 비가 내리나 봅니다. 우산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빗방울은 2방울뿐입니다. 이는 <빗소리>라는 작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산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2방울이 전부입니다. 극한의 생략이지만, 신기하게도 우리의 인식은 그 빈 공간들을 전부 비로 채웁니다. 비움으로써 가득 찬 느낌을 만드는 것입니다. (제1역설)
비가 오면 우리 모두 자기만의 공간을 만듭니다. 작가는 그것을 ‘작은 집’이라 말합니다. 저마다 자기만의 방을 가지는 셈입니다. 그 안에서 빗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옷은 젖는데 마음은 편안해집니다. 빗소리의 매력입니다. ‘세상은 온통 젖었는데 / 마음은 보송보송하다’라는 표현이 마음에 와닿습니다.(제2역설)
빗소리는 참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작 그 소리를 담아낸다면, 시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온통 사방에서 떨어지는 물소리. 흙에도 떨어지고, 지붕에도 떨어지고, 창문에도 떨어지고, 차 위에도 떨어지면서 온갖 소리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런 모든 소음이 모여 사람의 귀에는 평온한 마음을 만들어 냅니다. 빗소리처럼 일정하고 반복적인 자연음은 오히려 주변 소음을 막아준다고 합니다. ‘소리 장막’이라고 하죠. 그런 자연의 소리를 계속 듣고 있다 보면 곧 심박수와 호흡이 안정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제3역설)
비는 그쳤다고 끝나지 않습니다. 작품 <빗소리>에서도 느껴집니다. 인물로 보이는 자가 우산을 접어 털어내고 있습니다. 비가 그쳤다는 것이겠죠. 그런데 작품명은 ‘빗소리’입니다. 뭔가 이상합니다. 그런데 풍경을 보니 이해가 갑니다. 비의 냄새가 진하게 묻어나 있습니다. 비 온 뒤 주변을 자세히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마치 수채화 물감을 진하게 풀어놓은 듯 모든 물체가 촉촉하고 진하게 보이거든요. 그러니 비는 그쳤지만 비의 흔적은 지속되는 겁니다.(제4역설)
작가 역시 비 오는 날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러나 참 역설적으로, 비가 올 때마다 몸 이곳저곳이 아픕니다. 이번엔 특히 정신이 몽롱하기까지 합니다. 비가 내리면 그동안 내가 얼마나 몸을 함부로 썼는지, 어디 부위가 제일 약한지 다 들통이 납니다. 비가 내리는 걸 보면서 빗소리를 들을 땐 참 즐겁고 평온하다가도 정작 몸은 그렇지 못한 것이죠.(제5역설)
비는 참 역설적입니다. 비가 올 땐 흐릿하지만, 비가 한 번 와야 모든 것이 선명해지니까요. 오늘 두 작품을 보며 ‘역설’과 관련된 생각을 문득 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