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조리개 사이로 붙잡은 소중함
시간은 요즘 나를 피해 달아나는 것 같다. 눈꺼풀이라는 막이 내려왔다 올라오는 그 찰나의 조리개 사이로, 일주일이라는 거대한 시간이, 마치 누군가 내 삶의 필름을 고속으로 돌리고 있는 것만 같다. 왜 이리 시간이 빠른 걸까?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시간이 빠른 게 아니라, 내가 붙잡고 싶은 게 많아진 거였다. 가족의 얼굴, 누군가의 웃음, 내가 그린 한 줄의 선. 그 사이에 놓치고 싶지 않은 너무 많은 ‘소중함’ 때문에 그것을 따라잡지 못하는 것이었다.
초침이 지구를 돌듯 집안을 빙빙 돈다. 무언가를 열심히 하려 할수록, 삶의 질이라는 신기루는 자꾸만 저만치 달아난다. 집안이라는 거대한 시계태엽 속에서 매일 똑같은 궤도를 도는 인공위성이 된 기분이다. 반복되는 하루는 때로 나를 숨막히게 한다. 하지만, 또 어떤 날에는 나를 포근하게 감싸는 담요 같다. 결국 이 팍팍한 우주를 지탱하는 중력은 가족이다.
문밖의 세상이 나를 부른다. 뇌가 기억할 ‘새로운 자극’이 필요해서다. 글감을 찾아, 나를 찾아. 그러나 현관문 앞에서 멈춘다. 현실은 언제나 낭만보다 작은 영수증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 작은 세계 안에서 글감을 찾는다. 늘 여기 있었는데도 못 본 것들을 기어이 찾아낸다.
내 마음이 복잡한 탓에, 요즘 붓 끝에서 태어나는 색채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엉킨다. 그림마저 내 복잡한 미로를 닮아가는 듯하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캔버스 앞에 서서 붓을 쥐는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소음이 소거된다. 가사일의 분주함도, 늙어감의 쓸쓸함도, 돈의 압박도 하얀 광장 위에서는 모두 조용해진다. 그림을 그릴 때, 나는 비로소 온전한 ‘나’라는 우주의 주인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다시 숨 쉬게 하는 장면들이 있다.
몇달 전부터 나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한 아주머니가 있다. 붓을 든 그녀의 얼굴에서 피어나는 아이 같은 미소, 온 세상을 얻은 듯 신나 하는 그 몸짓을 보며 나는 기묘한 전율을 느꼈다. ‘아, 내가 타인의 우주에 행복의 불을 켤 수도 있구나.’ 그 순간 내 안에서 조그만 욕심이 싹을 틔었다. 이 조용한 행복의 방에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함께 붓을 잡았으면, 내 화실이 세상의 지친 영혼들을 치유하는 작은 방주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따스한 욕심 말이다.
그리고 가족.
점점 작아 보이는 남편의 등을 바라보면 마음이 시리고 짠하다. 젊은 날의 그의 등은 넓고 단단했다. 마치 세상을 다 떠받칠 수 있을 것처럼, 이유 없는 자신감으로 팽팽했다. 나는 그 등을 보며 안심했고, 아무 의심 없이 기대었다.
그리고 세상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부딪히며 아직은 쓰디쓴 열매를 삼키고 있는 안쓰러운 내 아들. 그러나 동시에 자랑스럽다.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이미 절반쯤은 도착한 사람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인생은 결과보다 방향이라는 것을 그를 통해 나는 다시 배운다.
가족은 나의 광야이자, 동시에 나를 숨 쉬게 하는 산소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의 중력 속에서도, 그들의 존재라는 부력 덕분에 나는 매일 침몰하지 않고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다. 우리들의 사랑은 요란하지 않지만, 오래된 나무처럼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나는 이 빠르고 팍팍한 흐름을 멈추기 위해, 아주 조금씩 내 이야기를 글로 받아 적기 시작했다. 가족을 향한 애틋함은 문장마다 스밀 따스한 잉크가 된다. 비록 당장은 한 줄 떼기도 버거운 현실이지만, 캔버스 위의 거친 붓터치와 흐릿해진 눈으로 바라본 세상의 풍경이 모두 나의 글감이 될 것이다. 이 수많은 비틀거림과 가슴 시린 행복의 순간들을 엮어 언젠가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내놓을 날을 꿈꾼다. 밖으로 나가 돈을 쓰지 않아도, 내 안의 심연으로 내려가면 그곳이 바로 가장 풍요로운 글감의 화수분이다.
눈 한번 깜빡할 때마다 일주일이 사라진다면, 그 사라진 일주일의 궤적을 캔버스 위에, 그리고 원고지 위에 영원히 붙잡아 두리라. 삶은 여전히 버겁고 내 뜻대로 흐르지 않지만, 나는 오늘도 고요한 혼돈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의 우주를 채색해 나간다.

멋짐 발사
멋짐 발사
내 기억 속 당신의 등은
세상을 떠받치던 커다란 우주였다
획, 획, 거침없이 그어 내린 선마다
젊은 날의 자신감이 튀어 오른다
세상의 소음을 단번에 소거해 버리는
당당하고 유쾌한 저 뒷모습
붓 끝에서 다시 살아난 당신은
오늘도 세상을 향해 온몸으로 외친다
봐라, 이것이 나의 ‘멋짐 발사’다

당신의 청춘에게
당신은 거대한 활시위
가장 팽팽하게 당겨지던
그 시절의 곡선
거친 먹선은
당신이 헤쳐 온 바람의 흔적
검게 뭉쳐진 주먹은
우리가 함께 건너온 시간의 밀도
당신이 온몸을 비틀어
쏘아 올리려 했던 것은
나와 우리라는 이름의 빛
그 힘차고 당당했던 청춘의 날들을
이토록 아름답게 간직해 주어서
감사합니다
여전히 나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곁에 있어 주어서
고맙습니다
타자의 시선이 작품에 머물 때
– 에디터의 작품 감상 –

삶의 이야기는 디테일한 묘사가 아닌 과감한 생략에서 드러난다
〈멋짐 발사〉
〈당신의 청춘〉, 〈당신의 청춘에게〉
수많은 그림 사이를 걸어 다니다 보면 눈에 확 들어오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재료가 좋아서일까요? 그림의 디테일이 너무 좋아서일까요? 그 비밀은 많은 내용들을 담으려 하지 않고 단 한 가지의 주제에 제대로 힘을 줬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감상자는 이미 감각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표현이 디테일한 것보다 무엇을 과감하게 버렸느냐가 더 큰 울림을 줍니다. 깊은 사유로 끌고 갑니다. 잘 찍은 사진과도 비슷합니다. 무엇에 집중(포커싱)했고, 무엇을 날려버렸냐(아웃포커싱)가 핵심입니다. 물론 다양한 구도와 기법이 있기에 무엇이 우수하다는 아닙니다만, 어떤 기법이든 사실 이 생략 기법은 모두 적용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조망하며 그린 그림이나 사진도, 사실 그 프레임 안에 들어오지 않은 부분이 바로 생략 기법을 사용한 것이니까요.
한국의 동양화가 더 뚜렷하게 이 ‘생략’을 보여줍니다. 흔히들 ‘여백의 미’라고 불리죠. 근데 이 여백이 사실 굉장히 어려운 기술입니다. 여백의 공간감과 중앙의 피사체와의 거리, 여백들끼리의 면적까지 모두 감각적인 계산하에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기법은 그림에서만 쓰이는 것은 아닙니다. 오케스트라의 협연에서도, 합창에서도, 심지어 글에서도 모두 쓰이죠. 어느 파트가 메인 멜로디냐, 어떤 문단이 가장 중요한 문단이냐. 그리고 그 메인을 위해 누가 뒤로 빠졌느냐 같이 표현됩니다. 어쩌면 한 번에 하나씩만 인지할 수 있는 뇌의 역량 때문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삶 또한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다 말할 필요도 없고, 모든 것을 다 이해시킬 필요도 없습니다. 운동을 열심히 한 사람의 근육이 그렇죠. 그동안의 노력을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응축된 근육의 결로 자연스레 표출됩니다.
오늘의 두 작품도 그렇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큰 획 하나로, 두껍게 찍어 올린 점으로, 그리고 그렇게 모여서 그려진 넓은 등으로 많은 이야기들을 담아냅니다. 지금까지의 삶이 그렇게 응축되어 담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