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는 체호프의 단편선을 읽으며, 나의 일상을 체호프식 글쓰기로 조심스레 흉내 내 보았습니다.
체호프 문학을 관통하는 핵심은 독자에게 ‘명확한 결론’이나 ‘도덕적인 교훈’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다만 삶의 한 단면을 조용히 떼어내어 우리 앞에 내어놓을 뿐입니다.
이야기 속 인물들은 어리석고, 이기적이며, 때로는 지나치게 소심합니다. 그러나 체호프는 그들을 쉽게 악인으로 규정하거나 단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한계와 모순을 인간적인 연민으로 감싸 안으며, 독자 스스로에게 묻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좁은 코너의 마에스트로
서울 도심에 며칠째 눅눅한 장맛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혜정은 예배당 뒷자리, 칸막이 하나로 간신히 구획을 나눈 좁은 모퉁이 의자에 앉아 마우스 휠을 굴렸다. 사람들은 그곳을 ‘방송실’이라고 불렀지만, 실상은 컴퓨터 한 대와 앰프가 놓인 책상 하나가 전부였다. 환갑을 넘긴 그녀의 손가락은 나이가 무색할 만큼 빠르고 정확했다. 목사인 남편의 설교 속도와 성도들의 찬양 호흡에 맞춰 피피티(PPT) 화면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스크린에 띄워졌다. 1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이 그녀를 이 좁은 코너의 대체 불가능한 마에스트로로 만들어 놓았다.
스크린 불빛 아래로 듬성듬성 앉은 성도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대부분 연세가 지긋한 분들이었다. 유일하게 젊은 남자 집사님이 떠올랐다. 소방관인 그는 현장을 누비는 바쁜 직업 탓에, 예전처럼 토요일마다 나와 예배당을 청소할 여력이 없는 듯 했다. 혜정은 화면을 넘기며 생각했다. ‘내가 없으면 이 예배 자막은 멈추겠지.’ 그 사실은 작은 자부심인 동시에 벗어날 수 없는 무거운 닻이었다.
오후 예배가 끝나고 성도들이 빠져나가면, 혜정의 또다른 하루가 시작된다. 곳곳의 쓰레기통을 비우고 청소를 하는 것은 온전히 혜정과 아들의 몫이었다. 허리를 굽힐 때마다 어제 땀범벅이 된 채 예배당 바닥을 닦던 남편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경제적 자립이 힘든 개척교회를 지키기 위해 평일에는 투잡을 뛰는 목사 남편이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피로감이 오늘 혜정의 어깨 위로 고스란히 옮겨와 있었다.
청소를 마치고 돌아온 곳은 상가 건물을 개조한 사택이었다. 2층은 교회로, 3층은 사택으로 사용하고 있다. 온돌이 깔리지 않은 바닥은 겨울이면 싸늘했고, 작은 소파 하나 없는 거실, 천장에서는 냉난방기만 웅웅거리며 습한 바람을 불어내고 있었다. 창밖으로 비가 내렸지만, 도심의 상가 건물에서는 어릴 적 기억 속의 아련한 흙냄새 대신 축축한 콘크리트 냄새만 흘러들었다.
혜정은 아들이 내려준 따뜻한 커피 향기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화장실로 향했다. 세탁기에 빨랫감을 넣고 전원을 켰다. 그녀는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그 앞을 떠날 수 없었다. 문제가 심각한 하수구 탓에 방심하면 물이 역류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물이 차오를 때마다 수동으로 배수를 조절하며, 윙윙거리는 세탁기 통창 너머로 돌아가는 빨래들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혜정은 헛웃음을 지었다.
샤워를 할 때면 매번 긴장감 속에 또 다른 의식을 치러야 했다.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아 벽에 달린 작은 전기 온수기에 의지해야 했는데, 이 녀석이 품을 수 있는 따뜻한 물의 양은 얄미울 정도로 적었다. 앞사람이 따뜻한 물을 다 써버리면 다음 사람은 온수기가 물을 다시 데울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만 했다.
온수뿐만이 아니었다. 가스관이 연결되지 않은 방 바닥은 사계절 내내 서늘한 냉골이라 실내화 없이는 발을 디딜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겨울이면 두꺼운 양말에 실내화까지 겹쳐 신어도 발끝이 꽁꽁 어는 것 같은 그 감각이야말로 거주 내내 혜정을 가장 괴롭히는 일이었다.
지금 같은 여름이야 미지근한 물로 씻고 맨발로 다녀도 그만이지만, 세탁기 물이 빠지는 것을 보며 혜정은 벌써부터 다가올 겨울을 떠올렸다. 겨울 샤워는 늘 쫓기듯 치러야 하는 전쟁이기 때문이다.
세탁기를 다 돌리고 식탁 앞에 앉았다. 소파가 없으니 몸을 기대고 편히 쉴 곳은 그 의자뿐이었다. 식탁 위에는 그녀의 노트북과 읽고 있는 글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그때 아들이 들어왔다. 콘텐츠 제작을 하는 크리에이터인 아들은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해내느라 늘 눈 밑이 퀭했다. 아들은 아이패드를 식탁 위에 올려놓으며 환하게 웃었다.
“엄마, 이거 봐요. 어제 보여준 거 최종 수정본이에요.”
아이패드 화면 속에서 혜정이 붓을 들고 캔버스를 채워가는 영상이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재생되고 있었다. 아들은 엄마의 글과 그림을 세상에 알리는 가장 열렬한 조력자였다. 오프라인에 마련된 작은 갤러리는 혜정의 개인 작업실이자 미술 클래스 공간으로 쓰이고 있었지만, 아들은 그곳을 넘어 온라인이라는 더 넓은 바다로 엄마의 작품을 부지런히 실어 나르고 있었다.
혜정은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쓰며 모니터 속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화면 속에서 붓을 쥐고 있는 손은, 방송실의 키보드 자판을 누르던 손이었고, 교회 쓰레기봉투를 묶던 손이었으며, 세탁기 옆에서 배수 버튼을 조절하던 그 손이었다. 하지만 아들의 감각적인 편집을 거친 화면 속에서, 그 손은 오롯이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화가의 손으로 빛나고 있었다.
“어때요, 엄마? 진짜 멋있죠?”
아들의 말에 혜정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밖에는 여전히 도심의 밤을 적시는 장맛비가 무심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하수구는 여전히 말썽이고, 겨울이 오면 또다시 온수기 물을 아껴가며 샤워를 해야 하겠지만, 상가 사택의 어둡고 눅눅한 방 안에는 아들이 켜놓은 모니터의 따뜻한 빛이 혜정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투잡을 뛰느라 지친 남편의 땀방울도, 아들의 퀭한 눈도, 혜정의 뻐근한 허리도 그 순간만큼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안에서 그녀가 지켜낸 글과 그림은 아들의 손을 거쳐 세상 밖으로 조용히 뻗어나가고 있었다.
체호프적 시선으로 바라본 한붓시인의 한마디
축축한 콘크리트 냄새와 차가운 냉골, 여전히 말썽을 부리는 하수구, 내 삶에는 어떠한 극적인 구원이나 거창한 반전도 없습니다. 하지만 체호프의 문학을 통과하며, 나는 나의 무겁고 눅눅한 일상을 있는 그대로 담담히 끌어안는 법을 배웠습니다.
키보드 자판을 누르고, 교회 쓰레기봉투를 묶고, 세탁기 배수를 조절하던 고단한 내 손이 아들의 화면 속에서 붓을 쥐고 환하게 빛나는 순간을 봅니다. 일상과 예술은 결국 다른 것이 아니라, 내 한 손에서 함께 피어나는 삶의 진짜 모순이자 미학이었습니다.
누군가를 탓하지도, 과도한 자기연민에 빠지지도 않은 채 내 삶의 한 단면을 조용히 떼어놓아 봅니다. 거창한 교훈 대신, 고단함 속에서도 묵묵히 켜지는 이 조용한 빛이 당신의 마음에도 따스한 질문으로 닿기를 바랍니다.

어쩜..(서러움)
아무렇지 않은 하루
삶은 대개
고장 난 것들을 달래며 이어지고
충분하지 않은 것들로
어찌어찌 채워진다
뭐 어때
어차피 진짜 삶은
역류하는 하수구 앞에서
커피 한 잔 들고서는
“아 , 또 이러네”
어쩜, 이 삶의
하이라이트일지도 모른다

골치 아픈일이 자꾸 생겨
아직 쓸 만
아직은_
“모든 기능 정상입니다”
누가 이런 자신감을
허락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도 공지 하나 없이 운영된다
가끔은 묻고 싶어진다
매일 고장 나기 직전인데
“이게 정상인가요?”
그러면 삶은 늘 같은 답을 준다
“일단 돌아가잖아요?”
그리고, 가끔씩
예상 못 한 타이밍에
작은 보너스가 튀어나온다
웃음이라든가
괜히 기분 좋아지는 순간 같은 것
그래서 더 좋다
타자의 시선이 작품에 머물 때
– 에디터의 작품 감상 –

본질은 외주금지
〈어쩜..(서러움)〉, 〈아무렇지 않은 하루〉
〈골치 아픈일이 자꾸 생겨〉, 〈아직 쓸 만〉
오늘은 정말 예기치 않은 일이 많이 일어난 하루였습니다. 정말 말 그대로 ‘통제불가능한 하루’였죠. 그래서 오늘 이 메일이 늦게 발송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제가 사용하던 툴들이 전부 망가지는 하루였습니다. 컴퓨터가 망가진 것이면 저는 어쨌든 태블릿이든 노트북이든 다른 기계를 붙잡고 씨름했겠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서버가 망가진거예요! 도구를 제공하던 회사들의 서버에, 그들의 도구에 문제가 생기니 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두 작품이 정말 많이 와닿습니다. 말 그대로 “골치 아픈 일이 자꾸 생겨!!!”였습니다.(느낌표는 꼭 3개여야 합니다)
아무렇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머리도 맑고 마음도 괜찮지만, 제 장은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부륵부륵’ 소화가 안되기 시작하고 장운동이 딱 멈춰버립니다. 고쳐 쓸 수 조차 없는 도구들이 있다는 것. 제가 작년부터 우려하던 일이 갑자기 현실이 되니 막막합니다. 내가 평소에 쓰던 도구들, 가령 AI들이죠. 이런 것들이 갑자기 멈춘다면 거기에 의존을 하던 사람들도 같이 멈추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본질적인 것일수록 맡기면 안된다는 것을 오늘 또 배웁니다.
당분간은 다양한 시스템을 이용해 “찾아가는 작은 전시회”를 보내드릴 생각이에요. 이번 기회에 더 다양한 도구들을 사용해 보겠습니다. 가능하다면 오로지 저희만의 시스템도 구축해 볼 생각이에요. 이번에 다시 한 번 더 느낍니다. 본질에 가까울수록 제 안에 둬야 합니다. 자꾸 맡기다 보면 언젠가 오늘의 두 작품처럼 울부짖는 자신을 보게 될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