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만남
평생 인생 1년 차
매일같이 세상한테
세게 얻어맞고도
“내일은 또 어떤 펀치가 날아올까?” 기대하는
우리는 평생 인생 수습기간인
귀여운 인생 1년 차들
살아간다는 것은
수많은 첫 만남을 반복하는 일
그리고 그 찰나마다
조금씩 늙어가는 것
우리는 평생을 초보자로 살아가기에
매 순간 생의 가장 푸른 첫 페이지를 써 내려간다
오늘도 나는 대단한 계획 없이
하루와 첫 만남을 한다

나에게 告하다
신작(新作)
어제는, 음~
그곳에 두고 왔습니다
오늘은
찰나 _
내일은 _______여백
매일이 신작인 화폭 위에
오직 ‘나’라는
단 하나의 명작을 펼친다
들어가는 말
우리는 매일 익숙한 계절을 산다고 착각합니다.
작년의 가을과 올해의 가을이 비슷하고,
10년 전의 나나 지금의 내가 그리 다르지 않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고개를 가만히 들어보면,
우리는 단 한 번도 지나본 적 없는
인생의 생소한 트랙 위에 서 있습니다.
매일 바쁜 일상을 이어가는 5060세대부터,
세상이라는 거친 바다에서 매일 노를 젓는 직장인,
내 오랜 친구.
그리고 열정만큼이나 고민도 깊은 30대 청년까지.
오늘이라는 날 앞에서 우리 모두는
사실 한 번도 안 살아본 인생 ‘초보자’들입니다.
문득 마음을 세차게 두드리는
뜻밖의 질문들이 찾아왔습니다.
익숙함이라는 허울을 벗겨내고,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정갈한 인생 포스터’ 뒤에,
진짜 ‘나’의 이야기,
영혼의 밑바닥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만드는
유쾌하고도 뭉클한 질문들을 꺼내어 봅니다.
아주 이상한 질문들 _ 오늘이 처음이라서
혹시 이런 질문을 받아보셨습니까?
“당신은 몇 살까지 살아본 사람입니까?”
무슨 말이냐고요?
지금 쉰여덟이라면
쉰여덟 살까지 살아본 사람입니다.
예순셋이라면
예순셋까지 살아본 사람이고요.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쉰 살을 살아봤으면서
쉰 살을 사는 법은 잘 모릅니다.
예순을 살아봤으면서
예순의 마음은 처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매년 인생 초보자입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인생에 익숙해지는 일이 아니라
새로운 나를 계속 처음 만나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번 이상한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당신은 배우자를 몇 번이나 제대로 만나보았습니까?
30년을 함께 살았다고 해서
30년 동안 같은 사람과 산 것은 아닙니다.
아마 우리는
30명의 서로 다른 사람과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젊은 남편,
지친 남편,
아이 때문에 잠을 못 자던 남편,
직장에서 자존심이 상했던 남편,
아무 말 없이 늙어가는 남편.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람을 보며 말합니다.
“당신은 원래 그렇잖아.”
참 무서운 말입니다.
사람은 변했는데
우리는 기억 속의 사람을 보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렇다면 이런 질문은 어떻습니까?
내가 가장 오래 오해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가족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
교회 안의 누군가일 수도 있고,
어쩌면…
나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나는 원래 못해.”
“나는 원래 사람들에게 상처를 많이 받아.”
“나는 원래 내성적이야.”
“나는 원래 신앙이 부족해.”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혹시 우리는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붙여놓은
오래된 이름표를
아직도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번에는 조금 더 불편한 질문입니다.
만약 오늘부터 아무도 당신을 칭찬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지금 하던 일을 계속할 수 있습니까?
목사님이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목회를
계속할 수 있을까요?
사모님이라면,
아무도 “사모님, 참 고생 많으세요”라고
말해주지 않아도
여전히 사랑으로 섬길 수 있을까요?
권사님이라면,
아무도 내가 교회를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
몰라준다고 해도
계속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묻습니다.
박수 없는 인생도
나는 사랑할 수 있을까요?
또 하나. 조금 엉뚱한 질문입니다.
내 인생에서 삭제 버튼이 딱 한 번만 주어진다면
무엇을 지우겠습니까?
실패?
상처?
후회?
누군가의 배신?
그런데 정말 그것을 지우고 싶습니까?
어쩌면 내가 가장 지우고 싶은 그 사건이
지금의 나를 만든
가장 중요한 문장일지도 모르는데요.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야겠습니다.
“무엇을 지울까?”가 아니라
“그 일을 겪은 내가 무엇이 되었을까?”
그리고 아주 이상한 질문 하나.
당신의 인생에서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하나쯤 있지 않습니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실수.
아직도 떠올리면 얼굴이 뜨거워지는 기억.
나만 알고 있는 비겁함.
나만 알고 있는 욕심.
나만 알고 있는 눈물.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를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완벽했던 기억이 아니라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그 장면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가는 말
질문은 우리 삶에 쉼표를 찍어주고,
굳어있던 마음에 다정한 온기를 불어넣습니다.
오늘 나눈 질문들에
지금 당장 명쾌한 답을 내놓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저 마음 깊은 곳에 가만히 품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흔한 말 대신,
질문을 바꿔봅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몇 년을 살아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만날 ‘새로운 당신’을 얼마나 기대하고 계십니까?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당신은
어떤 사람으로 깨어나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첫 인사를 건네고 싶으신가요?
타자의 시선이 작품에 머물 때
– 에디터의 작품 감상 –

현재가 말했다. “나는 존재할까?”
〈첫 만남〉, 〈평생 인생 1년 차〉
〈나에게 告하다〉, 〈신작(新作)〉
현재란 무엇인지 생각해 봤습니다. 그런데 저의 결론은 현재란 0으로 수렴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의되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죠. 이게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현재를 기준으로 그 전을 ‘과거’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후를 ‘미래’라 부르죠. 그런데 시간은 흐릅니다. 이 짧은 현재가 아주 조금이라도 지나가면 과거가 되고 현재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앞서있으면 ‘미래’가 됩니다. 결국 과거와 미래가 극한까지 서로 부딪히는 지점이 ‘현재’입니다. 과거와 미래가 현재라는 ‘점’으로 무한 수렴하는 것이죠.
너무 어려웠나요? 괜찮습니다. 이 복잡한 삼각관계를 작가는 오늘의 작품을 통해 명쾌하게 풀어냈으니까요. <첫 만남>이라는 작품을 보겠습니다. 굉장히 중의적인 작품입니다. 아이와 엄마의 첫 만남? 아니면 시에서 말한 것처럼 하루의 첫 만남? 아이와 엄마라는 관계는 그림에서 상하관계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모든 선이 교차하고 흐르고 연결되며 ‘오늘’이라는 한 주름 안의 두 생명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두 사람에게 오늘은 처음인 것이죠. 과거로부터 살아온 엄마가 아닌, 미래에서 온 아이가 아닌, 오늘 마주친 두 사람입니다.
아주 잘 찍은 사진들을 볼 때면 저는 세 가지 공통된 것을 느끼곤 합니다. 바로 포커스된 부분과 흐릿한 부분, 그리고 적절한 여백입니다. 작품 <나에게 告하다>에서도 똑같이 느낄 수 있습니다. 모자 부분은 흐릿하게 날아가고 있습니다. 배경과 합쳐질 것 같은 느낌도 주지요. 반면 얼굴은 매우 또렷하게 표현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옷을 보면 사실 옷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비 있습니다. 선 없이 아주 희미한 면과 면이 없는 곳을 이용해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는 마치 흘러간 과거(모자), 현재의 자아(오늘), 여백의 미래(옷)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그 셋이 적절히 어우러졌을 때, 작품이 됩니다. 과거의 것들은 흐릿해지는 지식이 되어 머리에 남습니다. 여백의 미래는 감각되지 않지만,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죠. 그리고 그사이를 살아가는 건 ‘나’입니다. 내 ‘자아’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순간을 작가는 사진처럼 남겨놓고 말합니다. ‘나라는 단 하나의 명작’이라고 말이죠.
결국 현재란 그런 것 같습니다. 나의 인식과 태도의 합이 아닐까요. 어떤 이는 자신의 오늘을 명작이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자신의 삶이 예술이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삶을 작품처럼 대하는 태도. 그것이 오늘 작품 속에 묻어난 현재의 존재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