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낯선 옷
붓 끝에 걸친 낯선 옷
거침없는 유연한 붓놀림
선명한 색을 입고
나만의 세계를 호령한다
선으로 다 그려내지 못한
수줍은 고백들이
서툴게 조용히 흩어진다
붓으로 그리지 못했던 마음
문장이라는 바늘을 만나
조금씩 한 땀 한 땀 꿰맨다
이 어색한 옷은
말하지 못한 추상의 비명
낯선 침묵을 완성해 간다

미학의 언어
두 벌의 옷
거친 붓끝이 지나간 자리
그어지고, 지워지는
그 찰나의 순간
한 손은 붉은 상처를 그리고
다른 손은 삼킨 문장을 토해낸다
어느 쪽이 진짜 나인지
굳이 묻지 않기로 한다
두 벌의 옷을 번갈아 입으며
서로를 품고 흐르는 미학의 언어
불꽃으로 피어나는
침묵의 노래
낯선 옷을 입고, 매주 당신을 찾아갑니다
원래 제 옷은 물감이 튀어 얼룩덜룩해진 작업복이었습니다.
추상화라는 언어로 제 안의 세계를 그리던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절박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내 안에 쌓여가는 이야기들을
어딘가에 꺼내놓지 않고서는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보는 사람이 “음….” 합니다.
나는 속으로 “음….” 합니다.
그림은 말이 없고,
작가는 말이 많아지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그림만으로는 다 전달되지 않는 아쉬움에
‘글’이라는 옷을 살짝 걸쳐보았습니다.
처음엔 그저 “내 그림이 조금 난해하니 친절하게 설명해 보자”라는
가벼운 설명서 느낌으로 시작했던 글이었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지금,
참 신기하게도 그 옷을 입고 보낸 시간은 뜻밖의 선물 같았습니다.
제 삶에 활력과 다정한 온기를 선사해 주었습니다.
마음속 엉킨 타래가 글을 쓰며 스르륵 풀리기도 했고,
그림을 그리면서도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던 마음을 글을 쓰다가 발견했고,
나 자신과 가장 솔직하게 대면하는 짙은 몰입의 시간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제 그림의 추상적인 언어를 시와 글로 번역해 얹을 때마다,
캔버스 위에 흩뿌려졌던 제 마음이 촘촘하게 정돈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림 앞에서는 색과 선과 형태를 붙잡고 있었다면,
글 앞에서는 생각과 감정과 기억을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옷장에 제 옷보다 남의 옷이 더 많이 걸려 있는 기분이 듭니다.
언제부터인가 붓을 잡는 시간보다
텍스트 커서의 반짝임을 노려보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노트북 앞에 앉으면 텅 빈 커서가 나를 취조하는 것 같습니다.
‘이번 주는 또 무슨 말을 할 건가요?’
도구로 가져온 글이라는 옷이
이제는 나를 짓누르는 거대한 갑옷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매주 이 자리에 섭니다.
이 번거롭고도 즐거운 이중생활을 그만둘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비록 글을 쓰는 전문 작가는 아닐지라도,
진심을 담아 캔버스에 색을 입히듯
한 문장 한 문장을 정성껏 적어 내려가는 이 시간이 저에게는 너무나 소중합니다.
메일함에 읽히지 않은 채 쌓여가는 숫자들을 봅니다.
반갑게 열어보시고 적극적인 다정함을 남겨주시는 고마운 분들이 계시는가 하면,
미처 열리지 못한 채 조용히 쌓여가는 메일들도 보입니다.
아이처럼 서운한 마음이 불쑥 고개를 들기도 합니다.
그러다 ‘내가 이 옷을 잘 못 입고 있나’ 싶어 마음이 살짝 옥죄여 오기도 합니다.
어색한 옷을 입고서도 이 옷을 선뜻 벗어던지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매주 글을 지어 세상에 띄운다는 것,
그것은 생각보다 근사하고도 꽤나 아슬아슬한 모험이거든요.
어떻게든 멋지게 문장을 완성해 내고,
제 마음과 그림의 조각을 조금 더 다채롭게 전하고 싶은
그림쟁이의 고집과 책임을 내려놓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입은 이 낯선 옷이 근사해 보일 수 있도록,
이번 주에는 제 노력을 조금만 더 어여쁘게 봐주시면 어떨까요?
메일을 열어 느긋하게 읽어주시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오늘 글도 잘 읽었습니다”라는 짧은 안부 한 줄을 건네주시는 것만으로도
제가 입은 어색한 옷은 금세 제 옷처럼 근사하게 착 붙게 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작은 반응 하나가
제게는 이 어색함을 기분 좋은 당당함으로 바꿔주는
가장 근사한 피팅룸이 될겁니다.
매주 저의 고뇌와 환희가 섞인 스케치북을 함께 펼쳐봐 주시는 여러분이 있어
저는 오늘도 기꺼이 이 행복한 부담감을 입습니다.
💌
그리고 혹시 오늘 글에서 마음에 남은 문장이 하나 있었다면,
그 문장을 저에게 돌려주셔도 괜찮습니다. ㅎㅎ
타자의 시선이 작품에 머물 때
– 에디터의 작품 감상 –

진취적 태도
〈낯선 옷〉, 〈붓 끝에 걸친 낯선 옷〉
〈미학의 언어〉, 〈두 벌의 옷〉
거칠고 대담한 붓질 사이로 여인이 보입니다. 뒤에 뭔가가 느껴지는지 고개를 살짝 돌려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낯선 옷이 살짝 묻어 있습니다. 작가에게 묻은 ‘낯섦’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사람은 주기적으로 옷을 사 입습니다. 예전에는 옷이 해져서 새로 사는 것이었겠지만, 지금은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혹은 자신의 업무에 더욱 효율을 내기 위해서(편한 옷 찾기 등) 추가로 구매하는 것이죠. 그렇게 자신에게 어떤 옷이 어울리는가 찾는 사람도 많고, 또 그것을 콘텐츠로 돈을 버는 사람도 많아졌습니다.
자신에게 맞는 옷을 찾게 되면 그것이 인생 처음으로 시도해 본 옷일지라도 마음에 들어 합니다. 주변의 칭찬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뭔가 어색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의 행동도 어색하게 튀어나옵니다. 표정이 굳습니다. 어딘가 불편한 사람처럼 경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겨내고 당당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엇이 다를까 생각해 봤더니 뜻밖의 곳에서 그 정답을 찾아냅니다.
바로 ‘표정’이었습니다. 그 표정에는 당당함과 자신감이 잔 들어있습니다. 그 자신감으로 무장된 표정에는 어떤 옷을 가져다줘도 소화해 내는 특유의 힘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어울리는가 미학적인가는 별개지만, 그 표정에서는 무엇이든 ‘먹어 치우겠다’는 의지가 느껴집니다. 저는 그것을 ‘삶의 태도’라는 옷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의 작품에서의 여인들 역시 자신의 한 부분에 걸쳐진 ‘낯선 옷’을 의식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대하는 태도가 평범치 않습니다. 자신의 가치를 알아서일까요, 그 태도는 어떠한 낯섦조차 소화해 내겠다는 인상을 줍니다. 표정이 그렇고, 포즈가 그렇습니다. 그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 낯선 것들을 품어냅니다. 그리고 다시 그 낯섦을 표출해 냅니다. 온전한 소화가 끝났다는 의미겠지요.
그래서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태생적인 ‘어색’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을 자기에게 어떻게 적용하고 소화할 것인가 하는 진취적인 ‘태도’가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그러한 태도가 없이는 어떠한 것도 소화할 수 없을 것입니다.